퇴직연금에서 손해 줄이는 5가지 점검법

얼마 전 상담에서 50대 직장인 고객 한 분이 퇴직연금 계좌 화면을 보여주셨습니다. 8년 동안 DC형으로 쌓인 돈이 7,200만 원 정도였는데, 대부분이 연 2%대 원리금보장 상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고객님은 안정적으로 둔 줄 알았지만, 같은 기간 물가와 임금상승률을 생각하면 실제 구매력은 꽤 깎인 상태였습니다. 퇴직연금은 노후자금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노후자금이라기보다 ‘회사에서 알아서 넣어주는 돈’ 정도로 방치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1. 먼저 내 퇴직연금이 DB형인지 DC형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퇴직연금은 크게 DB형, DC형, IRP로 나뉩니다. DB형은 퇴직 직전 평균임금과 근속연수에 따라 받을 금액이 정해지는 구조입니다. 운용 책임은 회사 쪽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DC형은 회사가 매년 임금의 일정 비율을 계좌에 넣어주고, 그 돈을 근로자가 직접 운용합니다. 같은 퇴직연금이라는 이름을 쓰지만 손익 책임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연봉 6,000만 원인 근로자라면 회사가 DC형 계좌에 매년 대략 500만 원 안팎을 넣어주는 식입니다. 이 돈을 15년 동안 연 2%로 굴리면 약 8,600만 원 수준이지만, 연 5%로 굴리면 약 1억 800만 원 수준까지 차이가 납니다. 단순 계산만 해도 2,000만 원 이상 벌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높은 수익률에는 변동성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무조건 공격적으로 운용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DC형인데도 본인이 DB형처럼 방치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위험입니다.
2. 원리금보장 상품만 고집하면 안전해 보여도 손해가 날 수 있습니다
은행 PB센터에서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퇴직금은 절대 잃으면 안 되니까 예금으로만 해주세요.”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놓친 부분이 있습니다. 원금 손실을 피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10년, 20년 뒤 쓸 돈이라면 물가 상승도 같이 봐야 합니다.
연 3% 예금에 넣어도 물가가 연 3% 오른다면 실질 수익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수수료와 세금까지 고려하면 체감상 돈이 불어났다는 느낌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30대, 40대의 DC형 퇴직연금이 전부 정기예금에만 들어가 있다면, 저는 보통 자산 배분을 다시 보자고 말씀드립니다.
- 퇴직까지 15년 이상 남았다면 일부는 주식형·채권형 펀드나 TDF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 퇴직이 5년 이내라면 원리금보장 비중을 높여 변동성을 줄이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 이미 다른 계좌에서 주식 비중이 높다면 퇴직연금은 균형을 맞추는 용도로 써야 합니다.
3. IRP는 세액공제보다 중도해지 비용을 먼저 봐야 합니다
IRP 상담을 하다 보면 세액공제만 보고 가입한 분들이 많습니다. 연금저축과 IRP를 합쳐 세액공제 한도를 채우면 연말정산에서 꽤 체감되는 금액이 돌아옵니다. 총급여와 납입액에 따라 다르지만, 900만 원 한도를 채우는 경우 세액공제 효과가 100만 원 안팎에서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IRP가 자유로운 통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중도해지를 하면 그동안 받은 세제 혜택을 되돌려주는 구조가 될 수 있고, 기타소득세 부담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활비 비상금이 없는 분에게 IRP 한도부터 채우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카드값, 전세자금, 자녀 학원비 때문에 1~2년 안에 깰 가능성이 있다면 세액공제보다 유동성이 먼저입니다.
IRP 납입 전 체크할 숫자
- 비상금이 최소 3개월 생활비 이상 있는지
- 1년 안에 전세보증금, 자동차, 교육비 지출이 예정되어 있는지
- 신용대출 금리가 IRP 기대수익률보다 높은지
- 세액공제 한도를 채운 뒤에도 현금흐름이 버틸 수 있는지
예를 들어 연 7% 신용대출을 2,000만 원 들고 있으면서 IRP에 무리하게 900만 원을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세액공제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대출 이자가 매년 140만 원 수준인데, 현금이 묶여버리면 오히려 생활자금 압박이 커집니다.
4. 수수료 0.3% 차이도 20년이면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퇴직연금 수수료는 작아 보입니다. 연 0.2%, 0.4%, 0.6%처럼 표시되니 큰돈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기 계좌에서는 이 작은 숫자가 누적됩니다. 1억 원을 20년 동안 굴린다고 가정하면 연 0.3% 수수료 차이는 단순히 매년 30만 원이 아닙니다. 복리 효과까지 감안하면 나중에는 몇백만 원 차이로 벌어질 수 있습니다.
수수료를 볼 때는 운용관리수수료, 자산관리수수료, 펀드 보수까지 같이 봐야 합니다. 은행 앱에서 보이는 수익률이 좋아 보여도 내부 상품 보수가 높으면 실제 손에 남는 수익은 줄어듭니다. 특히 TDF나 펀드를 고를 때는 최근 1년 수익률만 보지 말고 총보수와 3년, 5년 흐름을 같이 보는 편이 낫습니다.
5. 퇴직 직전에는 수익률보다 인출 순서가 더 중요해집니다
40대까지는 어떻게 굴릴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50대 후반부터는 어떻게 받을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을지, IRP로 이전해 연금으로 받을지에 따라 세금과 건강보험료, 현금흐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담 현장에서 가장 아쉬운 경우는 퇴직금을 한 번에 받아 주택담보대출을 일부 갚고, 남은 돈은 생활비로 쓰다가 3~4년 뒤 노후 현금흐름이 비는 경우입니다. 대출을 줄이는 선택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퇴직 후 월 250만 원이 필요한 가구인지, 국민연금은 언제부터 얼마가 나오는지, 배우자 소득은 얼마나 유지되는지까지 같이 계산해야 합니다.
간단히 숫자를 놓고 보면 판단이 쉬워집니다. 퇴직연금 1억 5,000만 원을 10년 동안 나눠 쓰면 원금 기준 월 125만 원입니다. 여기에 국민연금 월 120만 원이 붙으면 월 245만 원이 됩니다. 그런데 생활비가 월 330만 원이면 매달 85만 원이 비고, 이 부족분은 예금이나 다른 자산에서 꺼내야 합니다. 이 계산 없이 일시금으로 움직이면 나중에 선택지가 줄어듭니다.
내 계좌에서 바로 확인할 4가지
퇴직연금은 좋은 상품 하나를 맞히는 게임이 아닙니다. 내 제도 유형, 남은 기간, 대출 금리, 세금, 수수료를 한 장에 놓고 보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저는 고객에게 계좌 화면을 열면 먼저 네 가지를 확인하라고 말합니다.
- 현재 DB형인지 DC형인지, IRP가 따로 있는지
-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 상품 비중이 얼마인지
- 최근 수익률보다 총수수료가 어느 정도인지
- 퇴직 예상 시점과 국민연금 수령 시점 사이의 빈 기간이 있는지
퇴직연금은 한 번에 크게 바꾸는 것보다 1년에 한두 번 점검하는 쪽이 실수 확률이 낮습니다. 특히 DC형과 IRP는 방치하면 회사나 은행이 내 노후를 대신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수익률을 조금 더 올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 돈이 어떤 조건으로 묶여 있고 언제 어떤 세금이 붙는지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숫자를 펼쳐놓고 보면 의외로 답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오래 가져갈 돈일수록 단순하고 버틸 수 있는 구조가 제일 오래갑니다.
